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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
Windenbrück Railway General Strike
시기
1916년 3월 9일 ~ 6월 2일
(보이콧: 4월 17일 ~ 6월 2일)
장소
원인
임금 삭감, 기업도시 통제, 교섭 거부
주체
상대
규모
최대 약 19만 명
피해
사망 30명 이상(빈덴브루크 11명)
재산 피해 약 2,700만 루이나 달러
결과
파업 실패, RRWF 해산, 번즈 투옥
국가조사위원회 구성, 노동자의 날 제정
1. 개요2. 배경
2.1. 하트웰 기업도시2.2. 1914년 경기침체와 임금 삭감2.3.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의 조직화
3. 전개
3.1. 하트웰 공장 파업3.2. 보이콧 선언3.3. 확산과 충돌
4. 정부의 개입
4.1. 금지명령4.2. 군경 투입4.3. 지역별 대응4.4. 체포와 재판
5. 파업의 종결6. 여론7. 여파
7.1. 노동운동의 변화7.2. 번즈의 전향7.3. 정치적 파장7.4. 노동자의 날 제정
8. 연표

1. 개요 [편집]

Windenbrück Railway General Strike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은 1914년 경기침체의 여파가 이어지던 1916년 봄, 빈덴브루크하트웰 궤도차량 주식회사(Hartwell Railcar Company, HRC) 공장에서 시작되어 루이나 전역의 철도망으로 번진 노동쟁의이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파업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1916년 3월 9일 HRC 공장 노동자 약 4,000명이 임금 삭감에 반발해 일으킨 살쾡이파업이고, 두 번째는 이 파업이 한 달 넘게 교착 상태에 빠지자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uina Railway Workers' Federation, RRWF)이 4월 17일부터 6월 2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인 HRC 객차 취급 거부, 즉 보이콧이다. "총파업"이라는 명칭은 통상 이 두 번째 단계를 가리키며, 당대 신문과 초기 연구서에서는 "빈덴브루크 철도 대파업"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였다.

보이콧은 RRWF라는 하나의 조직이 HRC,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에 결집한 24개 철도회사, 루이나 노동총동맹(Ruina Labour Federation, RLF)을 비롯한 기성 노동조합, 그리고 조지 에스턴 총리가 이끄는 루이나 정부를 동시에 상대한 싸움이었다. 절정기였던 4월 말에는 약 19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고, 루이나 전역 수백 개 도시와 마을에서 화물 및 여객 수송이 상당 부분 마비되었다. 정부는 우편 열차 운행 방해를 이유로 법원의 가처분 명령을 받아냈고, RRWF가 이를 거부하자 에스턴 총리는 지방 당국의 요청 없이 군경을 투입했다. 빈덴브루크에서만 폭동으로 11명이 사망했으며, 다른 지역의 사망자를 합치면 30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재산 피해는 철도회사 추산만으로도 약 2,700만 루이나 달러에 달했다.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RRWF 의장 몽고메리 K. 번즈는 가처분 명령 위반으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RRWF는 이듬해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루이나 노동법과 노동운동의 방향을 결정지은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처음으로 노동쟁의에 군 병력을 대규모로 투입해 기업의 편에 섰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고, 이는 국가조사위원회의 조사, 하트웰 기업도시의 해체, 루이나 노동자의 날 제정, 그리고 번즈의 사회주의 전향과 루이나 사회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2. 배경 [편집]

2.1. 하트웰 기업도시 [편집]

찰스 R. 하트웰은 1880년 HRC를 창업한 뒤, 1884년부터 빈덴브루크 남쪽 외곽 엘름 크리크(Elm Creek) 일대에 공장과 노동자 거주 구역을 함께 조성했다. 하트웰 기업도시로 불린 이 정착촌은 하트웰 본인이 "모범적인 산업 공동체"를 목표로 직접 설계에 관여한 곳으로, 벽돌 연립주택 1,400여 호, 회사가 운영하는 상점 아케이드, 하트웰 기념교회, 도서관, 극장, 인공 호수와 공원이 들어섰다. 술집은 허용되지 않았고, 거리는 정기적으로 청소되었으며, 1890년대에는 사회개혁가와 외국 방문객들이 찾아와 감탄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정착촌의 실제 운영은 노동자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였다. 주택은 오직 임대만 가능했고 노동자의 주택 소유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임대차 계약은 회사가 열흘 전 통보만으로 해지할 수 있어 해고는 곧 퇴거를 뜻했다. 임대료는 빈덴브루크 시내의 비슷한 주택보다 20~25%가량 높았고, 회사가 공급하는 수도·가스 요금은 시내 요금의 1.5배에서 2배에 달했다. 회사 상점 이외에 경쟁 상점은 사실상 들어설 수 없었고, 도서관은 유료였으며, 교회 건물조차 임대료가 너무 높아 몇 년간 비어 있었다. 주민 자치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회사 감독관들이 주민의 생활 태도와 정치 성향을 보고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착촌은 "감시받는 마을"로 불렸다. 낮은 임금, 비싼 임대료, 그리고 유토피아적 노동자 정착촌이라는 이상의 실패는 파업 이전부터 오랫동안 HRC 노동자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2.2. 1914년 경기침체와 임금 삭감 [편집]

1914년 가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는 철도차량 산업에 직격탄이 되었다. 철도회사들은 신규 객차 발주를 사실상 중단했고, 1913년 2,300량을 넘었던 HRC의 연간 판매량은 1915년 400량 아래로 떨어졌다. HRC는 1914년 11월부터 1915년 3월 사이 공장 인력을 5,800명에서 3,300명으로 줄였다. 1915년 여름에는 남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직종별로 20~30%, 평균 25% 삭감했다. 하트웰은 "회사가 손실을 감수하면서 공장을 돌려 일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삭감이 임금에만 적용되었다는 점이었다. 임대료, 회사 상점의 물가, 수도·가스 요금은 단 한 푼도 내리지 않았다. 하트웰은 주택 사업과 제조 사업이 별개의 회계이며 주택 사업은 정상적인 수익을 내야 한다는 논리를 고수했다. 임금은 임대료를 먼저 공제한 뒤 지급되었기 때문에, 1916년 초 겨울에는 2주치 급여봉투에 몇 십 센트만 남은 사례가 잇따랐다. 같은 시기 HRC는 주주 배당금을 유지했다. 1916년 초 수주가 일부 회복되어 인력이 4,300명 안팎까지 다시 늘었지만, 임금은 삭감된 수준 그대로였다.

2.3.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의 조직화 [편집]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은 1913년 화부 조합 사무총장 출신인 몽고메리 K. 번즈가 창설한 조직이다. 기관사·화부·차장 등 숙련 직종별로 나뉘어 있던 기성 형제단 조합들과 달리, RRWF는 철도와 관련된 모든 노동자를 직종 구분 없이 하나의 산업별 노조로 묶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창설 3년 만인 1916년 초 조합원은 약 14만 명, 지부는 465개에 달했고, 그 대부분은 조차장 노동자, 전철수, 화물 취급원, 선로 보수원, 차량 정비공 같은 비숙련 지상직이었다.

1915년 겨울 번즈는 조직원들을 빈덴브루크로 파견했다. HRC 공장은 철도회사가 아니었지만, HRC가 공장 인입선 운영을 위해 자회사 형태의 소규모 철도(엘름 크리크 철도)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RRWF 규약상 가입 자격이 인정되었다. 임금 삭감과 임대료 문제로 불만이 쌓여 있던 노동자들은 빠르게 가입했다. 1916년 3월까지 HRC 노동자의 약 35%인 1,500여 명이 19개 지부로 조직되었으며, 그중에는 객차 내장재를 제작하는 재봉부 여성 노동자들로 구성된 지부도 있었다. 이 지부의 지부장이 애나 콜필드였다. HRC는 RRWF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조합 가입 사실이 확인된 노동자들을 선별적으로 해고했다.

3. 전개 [편집]

3.1. 하트웰 공장 파업 [편집]

1916년 3월 7일, 공장 각 부서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 46명이 HRC 부사장 윌리엄 대니얼스를 만나 임금의 1915년 이전 수준 복원 또는 임대료 인하를 요구했다. 대니얼스는 회사가 여전히 손실을 보고 있다며 거부했고, 같은 날 오후 하트웰이 직접 대표단을 만나 같은 답변을 반복하면서 대표단 참가자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3월 8일, 대표단 가운데 3명이 "작업량 부족에 따른 일시해고" 명목으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3월 9일 아침, 해고 소식이 공장에 퍼지자 도장부와 목공부에서 먼저 작업이 멈췄고 정오까지 약 4,000명이 공장을 빠져나왔다. RRWF 지부의 결의나 본부의 승인 없이 시작된 전형적인 살쾡이파업이었으며, 번즈는 신문 보도를 통해 파업 사실을 알았다고 훗날 술회했다. 3월 10일 HRC는 "추후 통보가 있을 때까지 공장을 폐쇄한다"는 공고를 내걸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구성하고 300명 규모의 피켓 조직을 편성했는데, 피켓의 임무는 회사 재산 보호와 음주·폭력 방지였다. 파업 초기 빈덴브루크 언론조차 "이례적으로 질서 있는 파업"이라고 평가했다.

파업은 곧 교착에 빠졌다. 하트웰은 3월 중순 벨포르로 떠나 협상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고, 시장 토머스 홀런드와 빈덴브루크 상공회의소 일부 인사가 제안한 중재도 "중재할 사안이 없다"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회사 상점은 4월 초 외상 거래를 중단했고, 임대료 체납 가구에는 퇴거 통보가 나갔다. 파업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는 RRWF, 빈덴브루크 지역 노동조합, 시민 기부, 그리고 홀런드 시장이 개인 자금을 보태 설치한 시 구호소에 의존했다. 3월 말 빈덴브루크를 방문한 번즈는 노동자들의 결의를 확인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전국적 행동을 주저하고 있었다.

3.2. 보이콧 선언 [편집]

4월 10일, 예정되어 있던 RRWF 제2차 정기 대의원대회가 빈덴브루크에서 개막했다.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 425명은 첫날부터 HRC 파업 문제를 다루었다. 4월 12일에는 애나 콜필드가 대의원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녀는 HRC 도장부에서 13년을 일한 아버지가 1915년 병으로 사망한 뒤, 회사가 아버지의 밀린 임대료 60달러를 딸인 자신의 급여에서 매주 공제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연설은 대회의 분위기를 결정지었다.

4월 13일 대의원대회는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HRC에 중재를 제안하고, 4월 16일 정오를 회신 시한으로 정했다. 4월 14일 대니얼스 부사장은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 중재할 사안이 없으며, RRWF는 교섭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회신을 보냈다. 4월 15일 대의원대회는 만장일치로 보이콧을 결의했다. 4월 17일 정오부터 RRWF 조합원은 HRC 객차의 연결·분리·정비 등 일체의 취급을 거부하고, 이를 이유로 조합원이 해고될 경우 해당 노선 전체가 파업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번즈는 폭력 사태와 정부 개입의 빌미를 우려해 대회 내내 신중론을 폈으나, 결의가 채택되자 이에 승복하고 지휘를 맡았다.

보이콧의 핵심은 철도회사들이 HRC 객차를 운행하지 못하게 만들어 철도회사 스스로 HRC에 타협을 압박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다만 기관사·화부·차장 등 열차에 탑승하는 직종 노동자들은 형제단 소속으로 RRWF 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보이콧에 참여하지 않았다.

3.3. 확산과 충돌 [편집]

4월 17일 정오, 빈덴브루크 서부 조차장의 전철수들이 HRC 객차 분리를 거부하면서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이튿날인 4월 18일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는 24개 회원사 총지배인 긴급회의를 열어 세 가지를 결의했다. HRC 객차 취급을 거부하는 노동자는 즉시 해고할 것, 해고된 자리에 대체 노동자, 이른바 파업 파괴자를 고용할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우편 열차에 HRC 객차를 연결할 것이었다. 세 번째 조치는 보이콧을 우편물 운송 방해로 규정해 정부 개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해고는 즉각 노선 파업으로 이어졌다. 4월 21일까지 나흘 만에 수십 개 철도회사 소속 12만 5천여 명이 파업에 합류했고, 4월 27일 절정기에는 약 19만 명에 이르렀다. 빈덴브루크를 지나는 간선 대부분이 멈췄으며, 벨포르-빈덴브루크 철도와 루이나 중앙철도 등 주요 철도의 화물 수송은 평시의 10~20%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축과 곡물 수송이 끊기면서 빈덴브루크의 육류·석탄·식료품 가격이 한 주 만에 급등했다. 파업 노동자 없이는 조차장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빈덴브루크에서 보이콧의 타격이 가장 컸다. RRWF 조합원들이 "단결"을 내세워 철도망을 마비시키면서, HRC를 향한 시민들의 압력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철도회사들은 협상을 거부하고 대체 노동자를 투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대체 노동자 상당수는 이민 노동자였다. RRWF 규약은 이민 노동자의 가입을 제한하고 있었고, 이들은 RRWF의 배타성이 자신들을 다른 노동 시장에서도 배제할 것을 두려워해 피켓 라인을 넘었다. 이는 노조가 처한 곤경에 민족적 긴장까지 더하는 결과를 낳았다. 빈덴브루크에서는 파업 참가자와 대체 노동자 간의 충돌이 매일같이 일어났고, 종종 폭력 사태로 번졌다.

4월 21일 저녁, 번즈는 빈덴브루크 인근의 철도 마을 그레이스턴에서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지지를 호소하는 평화 집회를 열었다. 6,000여 명이 모인 집회 자체는 평온하게 끝났으나, 번즈가 떠난 뒤 군중 일부가 조차장으로 몰려가 화물차 여러 량에 불을 지르고 기관차 한 대를 탈선시켰다. 이 사건은 이튿날 전국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이후 루이나 각지에서 연대 파업 참가자들이 선로를 막거나 전철기를 잠그고, 대체 노동자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었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촉구하는 여론도 함께 높아졌다.

4. 정부의 개입 [편집]

4.1. 금지명령 [편집]

파업 사태의 처리는 조지 에스턴 총리가 임명한 헨리 포그 내무장관이 맡았다. 포그는 철도 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내무장관 취임 이전에 복수의 철도회사로부터 거액의 착수금을 받은 전력이 있었고 취임 이후에도 루이나 중앙철도의 법률 고문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파업 초기부터 총지배인협회 회장 로버트 S. 웬트워스와 거의 매일 전보를 주고받았다.

4월 22일 포그는 빈덴브루크 지방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 정부 측 법률 고문들은 보이콧이 공정거래법이 금지하는 "거래를 제한하는 결합"에 해당하며, 우편 열차 운행을 방해해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4월 24일 판사 아서 P. 밀러드와 새뮤얼 웨인은 RRWF 관계자들이 파업에 영향을 받는 철도 직원들에게 "업무 수행을 거부하거나 태만하도록 강요하거나 부추기는" 행위 일체를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연설, 전보, 집회를 통한 설득 자체를 금지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훗날 웨인 판사는 노동 분쟁이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개입에 내심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빈덴브루크에 금지명령이 내려지자 각지의 철도 운영자들은 파업을 예상하고 포그에게 자체 금지명령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고, 4월 25일부터 28일 사이 전국 30여 개 법원에서 같은 내용의 명령이 잇따라 발부되었다. 번즈와 RRWF 지도부는 이를 무시했다. 번즈는 각 지부에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열차를 움직이고 모두를 끌어내려면 금지명령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4.2. 군경 투입 [편집]

4월 25일 벨포르에서 열린 내각회의에서 포그는 "공포 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빈덴브루크에 군경을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각료 대다수가 이를 지지했다. 내무부 경찰국장은 "정규 병력보다 약한 전력으로는 우편 열차의 통행을 확보하거나 법원의 명령을 집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에스턴 총리는 같은 날 육군 병력 2,000명과 내무부 경찰 병력 1,200명의 빈덴브루크 파견을 명령했으며, 이후 파업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육군 1만여 명과 경찰 5,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4월 26일 육군 소장 에드먼드 캐럴이 지휘하는 병력이 빈덴브루크에 도착해 서부 조차장과 중앙역 일대에 주둔했다. 번즈는 처음에는 군경이 평화를 유지하며 파업과 보이콧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 믿고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군경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열차 운행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보이콧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군경은 대체 노동자를 호위해 조차장에 투입하고, 피켓 라인을 해산시키고, HRC 객차가 연결된 우편 열차를 총검으로 엄호하며 출발시켰다. RRWF가 도시별로 루이나 전역의 교통망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는 이렇게 하나하나 저지되었다.

조지 에스턴 총리가 지방 당국의 요청이나 허가 없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같은 날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총리에게 병력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는 시 경찰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군 병력의 주둔이 오히려 시민을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턴은 4월 27일 회신에서 우편물 운송에 대한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이행할 뿐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실상 열차 운행 재개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그의 경제 노선에 부합하고 자본을 보호하는 데 훨씬 더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이는 우편물 배송 차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였다.

번즈는 폭력이 파업의 진행을 저해하고 군사 개입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처음에는 파업 확대를 주저했다. 그러나 군경이 투입된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파업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그는 RRWF 조합원들에게 법원의 금지명령과 군경 모두를 무시하라고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한 사람과 넓은 마음만이 금권정치와 오만한 독점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군대, 금지명령, 어용 언론에 겁먹지 마십시오. 파업을 지속하고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파업이 끝나면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은 조합원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을 보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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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의 투입과 그에 따른 유혈 사태는 오히려 더 큰 폭력 사태를 불러왔다. 4월 28일 빈덴브루크 서부 조차장에서 파업 참가자와 대체 노동자 사이의 난투 끝에 화물차 700여 량이 불탔고, 군중을 해산시키던 병력이 발포해 4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4월 29일에는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이어져 7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이틀간 빈덴브루크에서만 11명이 사망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는데, 사망자 중에는 파업과 무관한 구경꾼도 포함되어 있었다. 4월 30일에는 엘름 크리크 철교를 건너던 군용 열차가 탈선해 군인 5명이 사망했다. 당국은 노조원들이 철교를 폭파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번즈는 루이나 전역 모든 노동조합원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5월 3일 빈덴브루크에서 열린 루이나 노동총동맹(RLF) 집행위원회는 총파업 요청을 거부했다. RLF는 RRWF가 자신들의 조합원을 빼앗으려 한다고 보고 있었고, 의장 제이컵 홀스워스는 "패배가 확실한 싸움에 노동운동 전체를 던질 수 없다"고 밝혔다. 명망 높은 루이나 기관사 형제단화부 조합도 보이콧에 반대했으며, 번즈가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던 화부 조합은 이 문제를 두고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총파업이 무산되면서 보이콧의 확산은 사실상 멈췄다.

4.3. 지역별 대응 [편집]

파업은 루이나 전역 수백 개의 도시와 마을에 영향을 미쳤다.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기관사·화부·차장 등 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성 형제단 조합들은 이번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RRWF 조합원들은 파업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들은 대체로 비숙련 지상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일반 시민과 상공인들은 대체로 철도회사의 편을 들었고, 곡물 수송 운임과 철도회사의 독점에 오랜 불만을 품고 있던 농민들은 RRWF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주요 철도 거점 도시인 포트메이슨에서는 지역 정교회 신부 A. W. 캐버나가 RRWF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4월 23일 설교에서 이번 보이콧을 과거 루이나의 독립 쟁취 과정에 빗대며, 지방 관리들과 조지 에스턴 총리가 "건국 선조들의 정신을 저버렸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침략적이고 억압적인 기업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지키는" 대신, 지도자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금권 귀족의 순종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포트메이슨은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4월 30일 인근의 소규모 철도 거점 마을 록크로프트에 군병력이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격분한 파업 참가자들이 군용 열차를 에워싸는 사태가 벌어졌다. 몇 시간의 대치 끝에 간신히 유혈 충돌을 모면한 군병력은 해당 노선을 강제로 개통했다. 파업이 끝난 후 포트메이슨 해안철도는 파업에 가담했던 직원들을 전원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하버스턴에서는 보이콧이 노동운동의 거점 지역인 조차장 인근 노동자 거주 구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도심과 상업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파업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파업 참가자들이 1915년 임금 삭감에 대한 오랜 불만을 토로하며 철도회사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파업 참가자들은 폭력과 태업도 서슴지 않았고, 하버스턴 앤드 서부철도는 이를 내전이나 다름없다고 규정한 반면, RRWF는 비숙련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맞받아쳤다.

4.4. 체포와 재판 [편집]

5월 2일 몽고메리 K. 번즈와 사무총장 프랭크 오델을 비롯한 RRWF 집행부 4명이 우편물 운송 방해 공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1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5월 12일 법원이 철도 운행 방해 중단과 보이콧 해산을 명령한 금지명령에 불복종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번즈는 이번에는 보석을 거부하고 수감을 택했다. 5월 15일에는 RRWF 본부가 압수수색을 당해 각 지부와 주고받은 전보와 서신이 모두 압수되었다. 지도부가 구금되고 통신망이 끊기자 보이콧의 지휘 체계는 급속히 무너졌다.

번즈는 저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L. 크로스와 헨리 트럼블의 변호를 받았다. 1916년 9월 시작된 공모 재판에서 크로스는 번즈와 RRWF가 아니라 철도회사들이 총지배인협회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모여 노동자를 상대로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협회 회의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이 검찰에 불리하게 흐르던 중 배심원 한 명이 병에 걸리자, 번즈가 무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검찰은 10월 5일 공모 혐의를 취하했다. 크로스는 법원 금지명령 위반 혐의로도 번즈를 변호했지만, 배심원 없이 판사 단독으로 진행된 이 재판에서 번즈는 12월 14일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번즈는 브라이어필드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1917년 6월 출소했다.

파업 과정에서 엘름 크리크 철교 사고로 사망한 군인 5명을 기리기 위해, 1918년 빈덴브루크 외곽에 기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파업 참가자들에 의해 살해당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으며, 이 문구를 둘러싼 오랜 논란 끝에 오벨리스크는 2021년 철거되었다.

5. 파업의 종결 [편집]

5월 초부터 군경의 호위 아래 열차 운행이 재개되었고, 지도부 체포 이후 보이콧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철도회사들은 파업 참가자의 복직 조건으로 RRWF 탈퇴 각서를 요구했으며, 지부 간부와 피켓 참가자들은 복직에서 제외되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5월 중순에는 빈덴브루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열차 운행이 정상화되었다.

6월 2일 RRWF 집행위원회는 보이콧의 공식 종료를 선언했다. 6월 12일 HRC 공장이 재가동되었는데, 복직을 원하는 노동자는 RRWF를 탈퇴하고 향후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파업위원회 간부와 대의원대회 참석자를 포함한 약 1,000명은 끝내 복직하지 못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임대료 체납을 이유로 기업도시에서 퇴거당했다.

6. 여론 [편집]

조지 에스턴 총리는 파업이 점점 더 심각한 물리적·경제적 피해를 야기하는 상황에서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홀런드의 친노동적 사고방식과 사회 개혁주의적 성향은 외부인들에게 일종의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여겨졌다. 홀런드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늘 노동자 편에 선다는 점을 우려했으며, 사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업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론은 대체로 파업에 반대했고 에스턴의 조치를 지지했다.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동부 지역 의원들은 에스턴을 지지한 반면, 서부 지역 의원들과 진보파는 대체로 그를 비난했다. 홀런드 시장은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했고, 파업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전까지 시 경찰의 개입을 막았다. 그는 에스턴을 비난하며 정부의 개입 없이도 시 차원에서 모든 소요 사태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에스턴의 편을 들며 파업 참가자들을 악당으로 몰아세웠고, 홀런드 시장만이 파업 참가자들의 편에 섰다. 《벨포르 트리뷴》과 《빈덴브루크 헤럴드》를 비롯한 주요 신문들은 파업의 책임을 홀런드에게 크게 돌렸다.

언론 보도는 광범위했으나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각종 보도와 사설은 파업 참가자들을 군경이 표방하는 애국심에 반하는 외국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장과 철도에서 일하는 이민 노동자들이 파업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폭도, 이방인, 무정부 상태, 법질서 위반 등을 경고하며 여론을 자극했고, 번즈를 "독재자" 또는 "폭동의 왕"으로 불렀다. 에스턴 총리와 언론은 파업이 무정부 상태와 사회 불안을 조장할 것을 우려했다. 에스턴은 RRWF가 정부 권위에 대한 봉기를 부추기고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맹비난했다. 파업에 참여한 이민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부추겼다. 파업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실은 매체는 RRWF 기관지와 소수의 노동계 주간지뿐이었으며, 이마저 5월 중순 이후에는 우편 발송이 지연되거나 거부되었다.

한편 종교계에서도 파업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일었다. 하트웰 기념교회 목사 루이스 그랜빌을 비롯한 빈덴브루크 일대의 일부 기성 교회 지도자들은 보이콧을 비난하며 찰스 R. 하트웰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반발한 교인들이 교회를 대거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빈덴브루크 정교회의 니콜라이 베르진 신부는 RRWF와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성당 부속 건물을 파업 노동자 가족을 위한 급식소로 내주었다. 덜 알려진 여러 신부들도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7. 여파 [편집]

7.1. 노동운동의 변화 [편집]

보이콧 실패 이후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은 사실상 붕괴했다. 조합원 대부분이 블랙리스트를 피하기 위해 탈퇴했고, 지부는 잇따라 문을 닫았으며, 1917년 마지막 대의원대회에서 공식 해산이 결의되었다. 산업별 노조라는 RRWF의 실험은 이렇게 끝났지만, 그 이념은 이후 루이나 노동운동에서 되풀이해 등장하게 된다. RRWF가 붕괴된 후 많은 HRC 노동자들은 루이나 노동총동맹(RLF) 산하 직종별 조합에 가입했다.

1919년 찰스 R. 하트웰이 사망하자 HRC의 경영권은 새로운 경영진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회사는 노동자들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 우수한 주거·여가 시설을 제공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기업도시를 산업 용도로 전환했다. 녹지와 공원 대신 창고와 수리 시설이 들어섰고, 극장과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HRC가 루이나 철도차량 산업을 독점하며 계속 성장하는 동안, 하트웰 기업도시는 주택 노후화와 비좁은 생활 공간으로 점차 쇠락해갔다. 이 회사는 수십 년 뒤 문을 닫기 전까지 빈덴브루크 최대 고용주 자리를 유지했다.

7.2. 번즈의 전향 [편집]

1917년 6월 감옥에서 풀려난 몽고메리 K. 번즈는 사회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훗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법 앞에 서 있다는 믿음을 브라이어필드의 감방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출소 당시 빈덴브루크 중앙역에는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그를 맞으러 나왔다. 번즈는 석방 이듬해인 1918년 루이나 사회민주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이후 사회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수차례 출마했다.

7.3. 정치적 파장 [편집]

파업 주도자들, 특히 번즈에 대해 민사 및 형사 소송이 잇따라 제기되었고, 1917년 3월 루이나 대법원은 금지명령의 효력을 인정하고 번즈의 상고를 기각하는 만장일치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정부가 우편 운송과 공공 안전을 근거로 노동쟁의에 가처분 명령과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법리가 확립되었고, 이는 이후 수십 년간 루이나 노동쟁의에 대한 사법적 개입의 근거가 되었다.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정부가 고용주의 편에 섰다며 에스턴을 강하게 비난했고, 군 병력 대신 시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묵살된 것에 분개했다.

여론의 역풍을 의식한 조지 에스턴 내각은 1916년 7월 파업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국가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8월 빈덴브루크와 벨포르에서 청문회를 열어 하트웰, 번즈, 홀런드, 철도회사 총지배인, 노동자 등 100명 이상의 증언을 청취했고, 11월 보고서를 제출했다. 위원회는 찰스 R. 하트웰의 온정주의적 경영 방식이 파업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며, 기업도시 운영 방식을 "반시민적"이라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하트웰이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안긴 것을 강하게 질타했다.
미적으로 잘 꾸며진 시설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낼지 모르지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고서는 한편으로 총지배인협회의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하고, 노동쟁의에 대한 상설 중재기구 설치를 권고했다.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루이나 정부는 1917년 HR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920년 법원은 HRC의 정관이 기업도시 운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HRC에 하트웰 기업도시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주택은 1920년대 초 수년에 걸쳐 분할 매각되어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소유가 되었고, 기업도시는 이후 빈덴브루크 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상당 부분이 역사 지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7.4. 노동자의 날 제정 [편집]

파업 이후 조지 에스턴 총리와 의회는 노동계를 달래기 위한 제스처로, 급진적인 메이데이와 별개로 루이나 노동자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관련 법안은 보이콧이 공식 종료된 지 6일 만인 6월 8일 의회를 통과했고, 에스턴은 이틀 뒤 이에 서명했다. 파업 종식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동조했던 루이나 노동총동맹 의장 제이컵 홀스워스는 이 공휴일 지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면 RRWF의 잔존 세력과 번즈의 지지자들은 이를 "피 값으로 산 휴일"이라며 거부했고, 이후 메이데이와 노동자의 날은 각각 급진파와 온건파의 기념일로 갈라지게 되었다.

8. 연표 [편집]

날짜
사건
1914년 가을
경기침체 시작, 철도회사 객차 발주 중단
1915년 여름
HRC 임금 20~30% 삭감, 임대료·요금은 유지
1915년 겨울
RRWF 조직원 빈덴브루크 파견
1916년 3월 7일
노동자 대표단 46명, 하트웰 면담
3월 8일
대표단 3명 해고
3월 9일
HRC 공장 살쾡이파업, 약 4,000명 작업 중단
3월 10일
HRC 공장 폐쇄 공고
4월 10일
RRWF 대의원대회 빈덴브루크 개막
4월 12일
애나 콜필드 연설
4월 14일
HRC, 중재 제안 거부
4월 15일
대의원대회 보이콧 결의
4월 17일
보이콧 시작
4월 18일
철도총지배인협회, 대체 노동자 고용 결의
4월 21일
참가자 12만 5천 명 / 그레이스턴 집회 후 방화·탈선
4월 24일
빈덴브루크 지방법원 가처분 명령
4월 25일
내각, 군경 파견 결정
4월 26일
군경 빈덴브루크 도착, 홀런드 시장 철수 요구
4월 27일
참가자 약 19만 명(절정)
4월 28일~29일
빈덴브루크 폭동, 11명 사망
4월 30일
엘름 크리크 철교 군용열차 탈선 / 록크로프트 대치
5월 1일
번즈, 총파업 호소
5월 2일
번즈 등 집행부 4명 체포
5월 3일
RLF, 총파업 거부
5월 12일
번즈 금지명령 위반 혐의로 재수감
6월 2일
RRWF, 보이콧 공식 종료
6월 8일
노동자의 날 법안 의회 통과
6월 12일
HRC 공장 재가동
7월~11월
국가조사위원회 구성·청문회·보고서
10월 5일
공모 혐의 취하
12월 14일
번즈, 금지명령 위반 6개월형
1917년 3월
대법원 만장일치 판결
1917년 6월
번즈 출소
1917년
RRWF 공식 해산
1918년
루이나 사회민주당 창당 / 기념 오벨리스크 건립
1919년
하트웰 사망
1920년
법원, 기업도시 소유권 포기 판결
2021년
오벨리스크 철거